아직도 "우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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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이번엔 좀 긴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작년 봄에 적었던 글인데 원래 두편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리 두가지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이 글은 실험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고, 둘째 유럽에서의 저의 경험이 녹아들어 있기에 다른 곳에 계시는 분들이 가진 정서랑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쯤은 들여다봐도 좋은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읽어 주신 분들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고민거리 드림 (http://saramsori.new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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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우리"인가 1 - 단일성의 폭력과 정서의 굴절 >>

A. 들어가며

1. "우리"라는 말의 폭력 - "상처주는 우리"

우리는 우리라는 말을 우리답게 참 자주 사용합니다. 이 말이 안들어가면 무언가가 부족해 보일 정도지요 ^^ 그런데 아주 정감있어 보이는 바로 이 말이 때론 보다 개방적이고 열린 사고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폭력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폭력은 우리 외부로만 향하지 않습니다 (단일민족, 단일혈통 우짜고 저짜고), 바로 우리 내부에서도 일어나지요. 그래서 "사랑하는 우리"가 아니고 "상처주는 우리"라는 말이 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번 실험적으로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 부분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의되는 문제는 동시에 두가지의 상이한 측면이 매개되어 있습니다. 즉, 그 하나는 상처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라는 특수한 의식구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어지는 상처란 인간관계 또는 대인관계에서 생겨나는 아픔이고 이것은 일종의 정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서의 문제가 드러나는 방식이 여타의 민족들과는 다른 고유한 매카니즘을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우리"라는 말이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리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매개되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진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자면 역사적 고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부분은 최소한의 영역에 국한 시키겠습니다.

2. 내적연관과 외적연관

서로 주고받는 상처의 문제를 일종의 정서의 문제로 보게 된다면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한 개인의 내공과 생활상의 여유입니다. 유학생활에 대비해 보았을 때 공부가 잘 되고 재정문제에서 자유롭고, 진로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있다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외국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 민감하게들 반응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지금 문제가 되는 상처의 내적연관만을 보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가 하는 거겠지요. 그리고 상처가 여기저기에 깔려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연관에서 보았을 때 "나혼자 만의" 내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바로 이 지점부터 전 출발을 할 것이고, 이러한 일이 생기고 표출되는 외적연관과 그것과 수반된 한민족의 정서의 특질로 한번 나가보려 합니다.

그 전에 질문을 몇가지 던져보지요: "우리"라는 말은 소유관계와 연대의식의 표현이라는 양면성을 가집니다. 근데, "우리"라는 말이 지금도 혹은 유학사회에서도 유효할까요? 그리고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과 틀이 주어져 있습니까? 그리고 왜 한국인이라면 우리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이러한 생각부터 이제 좀 바꿀 때 되지 않았나요? 사람보고 사귀지 한국인이라는 국적보고 사귈 필요 없지 않나요? ^^

B. "우리"라는 말 또는 "우리"의식의 이중성

한국사회를 특징 짓는 것 중의 하나가 독특한 공동체 의식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이것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보통 다른 언어권에서와는 다르게 사용되어 지는 우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 개념이 근자에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또 동시에 은폐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이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지요.

공동체의식이라 하면 (전 여기서 퇴니스의 공동체 개념에 따르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이것은 게젤샤프트와 게마인샤프트의 개념구분이 제가 보건데는 한국사회의 그것과 좀 다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흔히 한 사회의 연대의식을 의미 합니다. 이 연대의식은 일종의 소속감으로 국가의식 또는 단체의식 등등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일단 국가의식은 예외로 하고 단체의식을 한번 보지요. 보통 단체의식은 소유관계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즉 어떤 단체에 한 구성원으로 참여는 하지만 자신의 소유와 자신과 타인의 소유관계가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지요. 그냥 쉽게 생각해서 어느 단체에 참여하는 회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선 이해관계도 분명해 집니다. 개인이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해야 하고, 또 단체의 위상에 대한 동의를 기초로 단체가 결성되어지지요. 그리고 지향하는 대상이 명확하며 소속감 또한 구체적으로 표현이 되어 집니다.

이러한 단체의식과 대비되는 개념이 제가 보건데는 한국사회의 우리의식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시 전통과의 연관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단일성의 폭력문제가 양산되어 가는 과정, 그것의 계보학(서로 상처주는 사회의 계보학)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지금 다루지 않을려고 합니다. 나중에 단일민족개념이나 혈연공동체니 우짜고 저짜고 하는 것들을 가지고 다시 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여하간에 지금의 우리의식은 이전의 전통에서 이해 되는 것들과도 좀 다릅니다. 이것은 물론 농경사회에서 생산과 소유관계가 상호밀접하게 연관되어있던 그 때와 지금의 사회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나름대로 유효하게 작용하던 유교의 사회통합논리가 있었거든요 (이 곳 게시판에 있는 글인 "나이문화의 계보학"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우리"라는 말이 "나"라는 말을 대체해 내고, 개인보다는 당연히 집단이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러한 전통의 잔재가 남아 있으면서 또 한편에서는 새롭게 변화된 사회에서 더이상 의미가 없는 부분들도 생겨나겠지요. 그럼에도 또 이것들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고요. 바로 이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 또한 지금의 "우리"라는 말 또는 "우리의식"입니다.

보통 서구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단체의 소속성과 참여도, 공통성등을 표현할 때 입니다. 물론 가족과 같은 좁은 단위에서는 "우리집"과 같은 표현을 쓸 수도 있지만 타자와의 관계에서는 우리집이라는 표현 말고 내집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확실한 소유주체를 드러내 버리지요. 게다가 우리 마누라, 우리 아들이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한국사회에서는 가능하지요. 사실 우리라는 말이 가지는 한 축인 연대의식만을 가지고 보자면 이해가 가는 내용이나 이미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소유관계 문제를 분명히 하게 될 때에는 들어맞지 않고 또 공허한 소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바로 이 연대의식과 소유관계의 모순이 바로 문제의 진원지 입니다.

즉, 지금의 우리의식의 성격들을 분석해 보면, 단체의식과는 달리 대상에 있어서 구체적이지 않고 너무 추상적이며 (예, 일상에서 통용되는 한국인 또는 한민족의 개념), 이해관계가 불분명 하고, 실질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소유관계를 껍데기인 말만은 아직도 표현해 낸다는 거지요 (예, 우리집에 밥먹으로 가요).

그런데 연대의식을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습관들이 있어서 우리의식이 기형적으로 변성화되어 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예를 들면 패거리문화, 조폭문화, 왕따만들기 등등입니다. 무언가 공통성을 보장할 만한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찾고, 또 그 구체화를 더욱 선명히 하기 위해 타자와 또는 타집단과의 선을 더욱더 분명히 그어버리는 거지요. 이것은 또한 기존에 많이 퍼져있는 비교의식하고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사회 전체에서도 아주 재미난 현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소유관계에 기초한 계급이 엄밀히 존재 함에도 계급정당은 아직 정치권에서 명확하게 자리자김을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빈민촌이 있음에도 미국이나 심지어 동남아에도 존재하는 대도시의 슬럼문화는 없습니다. 즉, 소유관계에서 양산되는 문제를 "우리"라는 의식이 은폐시켜 버리는 거지요. 이것은 게다가 자기의 문제를 자기의 것이 아닌 듯이 보이게 만들고 (한국에선 대분분이 중산층이랍니다 ^^ 실지로도 그렇나요?), 개인성의 상실과 기형적인 제도화의 문제와 단체의식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요. 바로 이러한 모습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또한 유학사회 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과 아울러 정서의 문제를 다음 시간에 한번 들여다 보지요.


<< 아직도 "우리"인가 2 - 유학사회에도 "우리"가 있나? >>

C. 하나의 예 - 유학사회에 부쳐

1. 유학사회에도 "우리"가 있나?

1-1. 문제제기

유학사회는 한마디로 작은 동네입니다. 어느 시골의 조그마한 한 마을을 연상해 보시면 될 것 같네요. 소문이 무성하고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며, 비교가 판을치고, 막상 마을의 대소사를 이야기 할 때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는 모습들, 게다가 서로에게 상처도 많이 안겨 주지요. 그런데 먼저 짚어 보고 싶은게, 기실 "유학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이 통용 가능한가?" 라는 겁니다. 여권에 국적을 가지고 보거나, 좋을 땐 삼키고 싫을땐 뱉어 버릴 수 있는 우리의식에서 보자면 그렇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 우리가 되기위해서는 어떤 확실한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게 존재합니까?

1-2. 한국인들의 情

한국인의 정서를 情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소에는 지지고 볶으면서도 혹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위기에 처해지면 그래도 하나로 뭉치고 서로 돕는 이러한 "정"에 근거해 우리가 그래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요. 한국사회가 정적이라는 것은 일면 타당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경험하기 힘든 독특한 것이지요. 서로 가르쳐 주는 걸 좋아하고 돕는 걸 좋아하는 측면이 있지요. 그러나 사회의 분화가 강하게 일어나고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곳에선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정이 밥먹여 주나?"하게 되지요. 정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 가변적인 어떤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대감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눈 앞의 이득을 ?는 이들에겐 하나의 이용거리 밖에는 되지 않고요. 순진하면 당합니다. 게다가 소유관계가 작용하는 계급적 구분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한마디로 공허한 것입니다. 유유상종이 되어야 하는데, 유유상종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비슷한 생활적 조건이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1-3.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들

그런데 유학사회는 마을은 마을인데, 가치관이나 기호뿐만아니라 하는 일도 너무 다르고, 신분이나 출신 계급도 너무 다르며, 그래서 노는 것도 당연히 너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유학생들의 재정력을 보면 한달에 2000오이로 쓰는 이랑 400오이로 쓰는 이가 있는데, 이 둘이 가진 자본의 차이가 엄청난 겁니다. 그래서 사실 만나면 비교는 되겠지만, 함께 나눌 이야기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어떤 이는 이 400도 똥빠지게 벌어야 하고, 어떤 이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2000이상이 굴러 들어올 수 있거든요. 그래도 굳이 만나 이야기를 한다면 정치이야기나 텔레비젼이야기겠지요. 그런데 왜 굳이 "우리"라는 식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벌써 가장 실질적인 이러한 일들에서 부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처가 양산될 소지가 있거든요. 그리고 한국에서 벌써 따논 신분증인 간판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겠지요 ^^ 좀 시덥잖은 예를 들면, 남편의 간판따먹기하는 아줌마들도 많이 계실 겁니다. 소련이나 동구권, 아니면 다른 아시아나 남미에서 온 유학생들의 파티장에 가보면 그네들의 처치가 나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엔 고만고만하고 유사합니다. 조금 많이 가진 자와 조금 적게 가진자의 문제고, 그리고 출신 성분이나 신분도 유사해서, 결국 이러한 것은 그네들에겐 문제가 크게 되지도 않지요. 다른 서유럽에서 에라스무스프로그램이나 소크라테스프로그램의 차원에서 공부하러 온 이들의 신분적 차이 역시 한국학생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그러나 한국유학사회에서 유학생들간의 차이(?)가 어디 그러합니까? 그리고 종교적인 차이가 발동을 하기도 할 겁니다.

2. 짐(?)으로서의 우리의식과 그것을 통한 정서의 굴절

아직도 우리의식에 싸여 비록 여러 병리현상도 보이지만 그럼에도 함께 가야 한다고, 그것도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는데 글쎄요. 이것도 여권만 그렇다는 거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동질성 또는 통일적인 무언가를 줄게 별로 없습니다. 다만 유학 오기 전 한국사회에서 경험한 문화적(?) 정서가 비슷할 수 있는데, 역시 세대간에 차이가 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 우리의식과 기형적으로 결합되어 오히려 안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외국인한테 상처 받으면 짜증은 나지만 할 수 없이 그런갑다 하는데, 다른 한국인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엄청 오래가고 골도 깊어 집니다. 언젠가 교포2세들을 믿고(?) 병아리 감별사하러 따라 왔다가 엄청 고생하시는 분의 사연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황당한게, 왜 교포라고, 즉 한민족이라고 좀 더 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고에서 출발했는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정서에 근거한 우리의식은 동질성 보다는 서로간의 차별성을 결국엔 더 많이 만들어 버립니다. 외국인이랑 비교하는 것은 포기하고 오히려 (전공에서) 별상관없는 한국인이랑 스스로를 엄청 비교해 버리는 일도 생기지요. 게다가 지금은 우리의식이 연대의식의 발로라기 보다는 일종의 이해관계의 산물입니다. 즉 우리가 도움이 되면 우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니라고 이해를 해 버리지요. 그리고 남과 선을 긋는 하나의 수단으로도 이해되어 집니다. 예를 들어 한인(유학)사회에서 특히나 사랑받는 토속(?) 한국교회라는 것도 이러한 과정의 산물이지요. 이방인(?)들끼리 모일 곳은 필요하고, 외로움 때문에 또 이해관계에 따라 자연히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배타적인 패거리문화가 양산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함부르크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독일인이 남부로 놀러를 갔는데 그곳에 교회가 없다면 주일날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인들에게 대입해 보면, 당연히 오우 노우!지요 ^^ 이처럼 한국사회의 우리의식은 "다른 것"에 대해 아주 폐쇄적인 모습도 띠게 되는데, 이것은 예를 들어 또한 어떤 한국인의 외국인과의 이성간의 교제를 바라볼 때도 그리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누구를 못사귀겠습니까, 원래 국경이 없어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역시 색안경끼고 뒤에서 궁시렁 거리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당사자는 참 힘들어지지요. 즉 지금의 우리의식은 많은 이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오게 되기도 하고, 또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허례의식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용은 사실 없걸랑요 (물론 좀 더 질이 다른 긍정성들이 있는데, 이 부분은 오늘은 제외됩니다). 그런데 무언가 좀 다른 것에 대한 거부, 차이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모더니티의 폭력이 아니고 바로 몰상식의 폭력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자신 역시 그러한 폭력 또는 상처주기에 내맡겨져 있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 앞에서 눈돌리기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건 병리적인 현상이자 자기 은폐의 미학(?)에 지나지 않지요. 게다가 우리의식 또는 민족주의라는 것이 기득권, 특히 그렇게 무식한 놈들이라 많은 이들이 욕하는 정치가들에게 오히려 잘 이용당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가 어쩌고 저쩌구..) ^^;;

위에 언급한 사례들 말고도 말고도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국에서 부터 잘못 배워 가져온 것이지요. 건강한 우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정서를 세련되게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놀이문화가 요구되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한국에서 부터 정서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에게 있어서 놀이문화가 공부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특히 요즘의 놀이문화가 한마디로 기형적일 때가 많지요. 당연 합니다. 어릴 때 부터 간판 따라다니다가 보니 노는 법을 제대로 배웠을 리가 없지요 (어떻게 잘 노는 건지 저에게 묻지 마세요 ^^;;). 바로 이러한 사실과 위에서 언급한 우리의식의 폐혜들이 짬뽕이 되면 사정은 더욱 골치 아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말이 바로 상처를 주고 받는 "틀"이자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나이문제와 학번의 차이, 군발이 문화 등이 아직도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지를 봐도 이것은 명확해집니다.

D. 맺음말

기형적인 우리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중의 하나인 유학사회, 그리고 정서의 굴곡을 그대로 한국에서 옮겨온 유학사회에서 여러분은 아직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까? 만약 찾는다면 이제 좀 더 세련되고 제대로된 우리를 찾아야 할 것 같지 않으세요? "서로 상처주는 우리"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하나의 "사실"입니다. 이것을 거부하거나 또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 병리현상을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정말 어려운 일이 시작되고,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번들 고민해 보세요,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요. 물론 이것은 당연히 공존의 의미를 아시는 분들께만 유효한 일일 겁니다.

E. 씰데없는 말

사족을 하나 달면, 제가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되면 가장 흔쾌히 가는 곳이 스페인이나 남미에서 온 사람들의 파티장입니다. 정말 흥이나고, 한마디로 가식이 없는 곳이지요. 가서 막 쳐지끼고 실컷 흔들다 오면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프뢸리히하지요. 좀 다르게 보면 이건 너무 경박하다거나, 좀 가볍다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오히려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단순한건 언제나 아름답걸랑요. 그리고 그네들의 삶이 단순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자신들의 정서, 최소한 스트레스푸는 법을 아니까요. 장기적으로 유학을 할 경우 자신의 스트레스를 잘 푸는 법을 가지고 있으면 참 좋습니다. 동시에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안주며 살면 이것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이것은 최소한의 것이고, 결국 문제는 진짜로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조건들이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사회에서 풀려야 할 일이지요. 그럼에도 보다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 유학생활동안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겁니다. 그게 뭘까요? ^^;;

그런데 솔직히 인정하자면 바로 이 질문은 시대 또는 세대가 바뀌면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라는 말에 연연하는 저같은 고리타분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아예 개인의 성공과 행복에다 모든 것의 촛점을 맞추는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 보이거든요. 어떤 일을 개선하고자 할 때 두가지 다른 동기에서 출발을 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나에게 불편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함께 보다 더 나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불편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호소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그 불편함이 사라지거나 아예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다른 이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로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출현이 이미 한국에서 시작되고 있고, 유학사회 역시 천천히 이들의 영향권(?)에 들어갈 겁니다. 그리 본다면 한인학생회와 같은 조직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운영이 되어질지 쬐금은 궁금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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